2018 , 고암이응노생가 기념관 일대, 홍성, 개인전
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타자화된 노년여성의 방치된 언어를 그들의 창작 활동을 통해 의미화하려는 계획을 품고 홍성에 왔다. 누구와 어떻게 시작할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막막한 상태였지만 현장의 생리에 따라 홍천마을 주민과 교류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한옥 스튜디오에 거주하면서 이응노 생가 일대에서 공공근로를 하시는 70~80대 노년 여성분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가 시작되었다. 공공근로가 끝나고 직접 청소하신 생가에 모여 첫 드로잉 모임을 진행했고, 이후 달라진 조건과 상황에 의해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더 많은 주민과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처음 그림을 그리자고 제안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주민은 단 한 분도 없었다. 모두 손사래를 치며 단호하게 거절하셔서 고민이 많았지만, 밥을 먹고 윷놀이를 하는 등의 함께 있는 시간이 쌓여서일까 “자꾸 해보자고 해서” 못 이기는 척 시작된 그림 그리기는 어느새 진지하고 몰입된 모임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마다 한결같이 이번만 하고 다시는 안 하겠다고 선언하셨고 사직서라면서 정성스러운 편지를 전해주신 분도 계셨다. 그림이 너무 재미있지만 이제 그만 하겠다는 내용을 멋진 그림과 함께 남기셨던 그분은 며칠 전 그림 모임에서도 놀라운 솜씨를 보이셨다. 이번에도 남편 밥을 챙기시기 위해 혼자 먼저 자리를 뜨시면서 이젠 정말 다시는 안 할 거라 하셨다.
전시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11월 어느 날, 7~8개월 동안 그림을 그리신 소감을 들었는데 한 분도 빠짐없이 정말 재미있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늘 안 한다고 하셨냐고 여쭤보니 그림이 내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아 그랬다고 하셨다. 더 잘 그리고 싶은데 그만큼 되지 않아 속상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림 그리기는 정말 재미있고, 성격도 밝아진 것 같아 계속하고 싶다고.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날짜와 이름을 쓰는 것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이름을 쓰는 일이 너무 드물어서 쓰기 전에 단단히 집중하지 않으면 실수가 발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이름이 불리고 남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드물다. 길게는 수십 년간 한마을에서 알고 지낸 이웃이지만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흔하다. oo네 엄마나 할머니가 아니면 이층집, 깃발, 관광차, 과수원 등으로 불린다. 주변 환경과 관계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호칭이 굳어진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집이’라고 뭉뚱그려 호칭한다.
집이.
개인이 사라진 호칭. 특정되지 않는 여자. 할머니, 어머니로 짐작되는 누군가. 나는 주민이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그림을 잘 그리신 것도 좋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그 누구도 대신하지 않는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온갖 정성을 다해 솜씨 있게 음식을 차려내고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까지 마무리해도 누구 하나 기억하지 않는 존재. 좋은 음식은 제일 먼저 남자에게 가는 것이 당연한 세대이자 늘 양보하고 나서지 않는 게 미덕인 세대. 그래서 너무나 쉽게 잊혀지고 뒷전으로 물러난 존재가 나만의 창작물을 만들어갔다.
주민과의 전시는 여러모로 불가능해 보였다. 애초에 권위 있는 이응노 기념관에 “할머니들 그림”을 전시하기로 한 약속과 계획은 프로젝트 초중반에 없던 일처럼 사라져버렸고, 그 문제의 심각성은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한 해프닝으로 희석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여성 작가가 기획한 할머니와의 전시를 위한 공간은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더 중요한’ 작품으로 채워졌다. 갑자기 사라진 전시장을 되찾기 위한 일은 수포가 되었고 이후 새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제안 철회와 장소 변경이 되풀이됐다. 결국, 네 번째 장소인 이응노 생가에서 가까스로 전시를 열 수 있었다. 전시가 끝나면 전시장도 철수된다. 이번 전시가 임의의 장소에서 잠시 선보인 이벤트로 마무리되지 않고 앞으로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 자리에서 그 누구도 대신하지 않는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